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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역시 자유를 맛본 자들은 믿을게 못 돼” 비전향장기수의 비참한 최후

기사승인 2018.08.16  01: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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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산 ‘인간은 자유를 버리면 우리 안에 갇힌 짐승이 된다’

1993년 7월, 북으로 송환된 이인모가 김일성과 김정일을 만나고 있다

김태산 전 조선-체코 신발 합영회사 사장은 2017년 9월 비전향 장기수가 북송 이후 김정일 정권에 용도폐기 당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김 전 사장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북송됐던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씨가 북송 이후 북한에서 겪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34년간을 복역하면서도 끝내 전향하지 않았던 유명한 이인모가 처음으로 송환됐을 때 그에 대한 북한의 배려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대단했다.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 할 최고급 단독 주택은 물론 북한 최고의 김일성 훈장과 공화국 영웅 칭호도 수여하였고 ‘신념과 의지의 화신’ 이라 부르며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의 산 모범으로 ‘민족과 운명’ 이라는 예술영화의 주인공으로까지 내세워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인 양강도 파발리 소학교를 ’이인모 소학교‘로 명명해주었고 김씨 가문과 동등하게 봉화진료소에서 치료받는 것은 물론 미국에까지 보내서 신병치료를 해주었다.

이인모 역시 비전향 장기수답게 당과 수령의 배려에 보답하기 위하여 수령에게 충성할 것을 독려하는 글들과 당과 수령을 우상화하는 장문의 글들을 연속 써냈다. 그가 쓰는 글들은 노동신문 1면에 대서특필 되곤 했다. 40여 년간을 적들의 감옥에서 꿋꿋하게 지켜왔던 그의 충성심은 참으로 대단했다. 전체 간부들과 국민들은 이인모 따라 배우기에 끌려다니느라고 적지 않은 땀을 뺐다.

수령에 대한 충성심 문제를 놓고는 중앙당의 간부들에게도 서슴없이 일갈을 하는 이인모 앞에 높은 간부들조차 마주 서기를 꺼려할 정도였고 김정일은 이인모가 가보고 싶은 곳은 모두 가보도록 막강한 권한도 주었다.

거침없는 충성의 일로를 달려나가던 이인모가 자기 일생의 반을 빼앗아간 감옥 생활이 떠올랐던지, 어느 날 갑자기 북한의 ‘교화소’를 한번 보겠다고 했다. ‘이인모 동지가 요구하는 것은 다 들어 주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간부들은 그를 데리고 사리원시에 있는 국제교화소로 갔다.

휠체어에 몸을 맡긴 이인모는 왜서인지 “국제교화소”를 돌아보는 장시간 동안 굳은 표정으로 한마디의 말도 없다. “사람 못살 남조선”에서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한 이인모가 아마도 너무 감동을 먹은 모양이라고 생각한 북한 간부들은 참관을 끝내고 마당에 나오자 “이인모 동지 돌아보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하고 자신에 넘쳐 물었다.

한참동안 먼 곳을 응시하던 이인모는 드디어 북한을 통째로 뒤흔들어 버리는 핵폭탄 발언을 터뜨렸다. “나는 이런 곳이었다면 34년은 고사하고 3년도 견디어내지 못 했을 거야.” !!! ???

그 자리에 있던 간부들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이인모의 얼굴만 쳐다보았고 마침내 그는 간다 온다 소리도 않고 그곳을 떠났다.

그 순간부터 30분도 채 되기 전에 노동당과 안전보위부, 인민보안성, 3개의 통보 선으로 이인모의 교화소 행적과 발언 내용이 김정일에게 직보되었다. 김정일은 분노하여 말했다.

“역시 자유를 맛본 자들은 믿을 게 못 돼”

그때부터 이인모는 “당과 수령의 신임을 저버린 쓸모없는 고깃덩이” 취급을 받았고 마침내 2007년 6월 누구도 찾지 않는 속에서 고독한 생을 마쳤다. 이것이 바로 자유를 버리고 충성의 길을 택하였던 공산주의자에게 차례진 쓸쓸한 종말이었다.

그 후부터 이인모에 대한 선전은 남한의 언론매체들에서도 사라졌다. 그러나 김정일은 더는 입을 열지 못하는 그의 시신을 애국열사릉에 안치시킴으로서 “광폭정치”의 선전 효과를 지금도 톡톡히 보고 있다.

물론 그 사건이 있은 후부터 2000년 9월에 송환된 63명의 장기수들은 선발된 선전용 몇 명을 제외하고는 자유란 없고 평양시민들과 같이 600그램의 쌀 배급과 배정되는 몇 가지 생활필수품에 의존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들이 북한에 들어가서 헤어졌던 가족들에게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특히나 남한에서 전향을 했던 분들은 아무리 강압에 못 이겨 전향을 했다고 해도 북한 땅에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찬밥 신세가 된다.

김 전 사장은 “북한에서 살 때는 그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던 김정일의 ‘판결문’과 같은 말 ‘역시 자유를 맛본 자들은 믿을 게 못 돼’가 이 남한에 와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보니까 더 심금을 울린다”면서 “자루 속의 송곳은 숨길 수 없듯이 자유를 한번 맛본 사람들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전혀 없는 독재 사회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진리를 김정일 자신이 직접 밝혀 주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변절도 하지 않았고 북한에 충성을 했으니 돌아간다면 아마도 특별대우를 해 줄 것이다’라는 생각은 자유를 버리는 그 순간부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무서운 후회를 몰아 올 것”이라며 “북한이란 나라를 국가전복 행위를 한 간첩도 살려준 자유대한민국처럼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서 “비전향 장기수 어른들의 부모와 자식들 그리운 마음에 나쁜 재를 뿌리자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면서 “두 제도를 살아본 사람으로서 북한의 감춰진 진실을 권해 드리고 싶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간은 자유를 버리면 우리 안에 갇힌 짐승이 된다’는 것이 내가 찾은 진리”라는 말로 글을 맺었다.

김영주 bluekim@bluetoday.net

<저작권자 © 블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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