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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미녀가수 명성희-'통일의 꿈을 노래하다'

기사승인 2012.08.17  0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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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무용대학 졸업
북한 영화방송 음악단 가수 활동
다수 영화 OST 참여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 졸업
한때 명가람 이라는 음반을 내고 트로트 가수로 활동
현 팝페라 가수로 활동 중



“남한에서 팝페라 가수로 성공해 통일 후 당당히 북한 친구들을 마주할 것”


팝페라 가수 탈북자 명성희 씨는 평양음악무용대학 출신이다. 그녀는 졸업 후 영화방송음악단에 들어가 북한 영화 ost 가수로 활동했다. 여러 영화의 주제곡을 불렀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던 유망한 가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그녀는 자유롭게 노래하고 싶은 꿈, 하나에 의지해 목숨 걸고 남한으로 넘어왔다.

입국 당시 그녀의 나이는 25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고민 끝에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음반회사의 권유로 트로트에 입문, 명가람 이라는 앨범으로 데뷔했다. 현재 음반회사와 헤어지고 홀로서기를 하는 그녀는 다시금 팝페라 가수로서의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작업 중인 앨범은 3달쯤 뒤에 발매될 예정이다.


- 우선 한국생활이 어떠신지 궁금하다

남한사회에서 가수로서 처음 데뷔하기가 어렵네요. 북한에 있을 때 영화방송 음악단 가수로 활동을 했는데, 한국음악을 너무 하고 싶었어요. 그나마 북한에선 영화음악에서나 자유스럽게 발성을 낼 수 있어요. 물론 영화음악에도 김일성, 김정일의 사상이 들어가 있죠.

지금은 음반회사와 결별하고 혼자서 가는 중이에요. 그 길이 쉽지만은 않죠. 하지만 어렵게 이 땅에 왔기에 가수로서의 저의 꿈을 이루지 못하면 후회할 것 같아요. 남한에서 가수 활동을 준비 한 게 5년 남짓 되는데, 얼마 전 일본 활동도 하고 왔어요. 반응이 좋아요.


- 특별히 팝페라 가수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한국에 왔을 때 제 나이 25이었는데. 당시 가요계엔 알앤비 음악이 주류를 이뤘어요. 그러던 중 음반회사의 권유로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게 됐어요. 정의성 작곡가님에게서 '얄리얄라', '어금니', '어그래' 등의 곡을 받기도 했었어요. 회사와 결별한 이후로 팝페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감사해요. 사실 남한보다 앞서 북한에 있었을 당시 팝페라 가수로 데뷔했었거든요. 크로스오버 음악인 팝페라 가수가 되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꿈 이였어요.


- 탈북을 결심하게된 배경은

22살, 영화방송음악단 소속 가수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자유롭게 음악을 하고 싶었거든요. 북한음악은 주체발성법으로 노래 해야 해서 심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던 중 자살 시도도 했었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인지, 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어요. 다시금 마음을 진정시켰죠. 하지만 그때부터 매일 남한으로 가서 자유롭게 노래할 생각만 했어요. 그러던 중 브로커를 통해 남한으로 올 기회를 잡은 거죠. 행운이었어요.

3옥타브의 음역대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폭발적인 성량을 소유한 성희 씨, 그 집안의 내력 또한 예사롭지 않다. 성희 씨의 어머님 또한 북한에서 인정받는 예능인 이었던 것. 성희 씨는 부모님의 좋은 피를 물려받아 감사하다고 말했다.

성희 씨의 부친은 북한 남자국가대표축구팀을 20년간 역임했던 명동찬 감독이다. 명감독은 1990년 남한과 북한에서 열린 통일축구대회에서 북한 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여러 국제 경기를 통해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북한 정권으로부터 ‘인민 체육인’이란 호칭을 부여받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 또한 당시 북한 최고의 예술단인 조선인민군협주단 내에서도 알아주는 가극배우로서 명성을 떨쳤다.


- 모친 또한 북한에서 유명한 공훈가수로 활동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가수의 길을 걷는 데 있어, 아무래도 부모님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다.

물론 어머니의 영향이 컸어요. 제가 처음 노래할 때 진성소리를 많이 썼거든요. 그래서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교수님들이 북한음악 하기 힘든 목소리라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공훈가수 출신인 어머니께 소리 내는 법을 배운 후 단기간 내에 발성이 클래식에 적합한 창법으로 바뀌었어요. 지금도 어머니는 제 노래의 스승이세요.


-가족이 북한에서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았는데, 탈북을 결심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도 컸을듯하다.

제일 먼저 어머니하고 상의했어요.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북한에서 아이스크림 공장을 크게 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어머님은 가도 좋고 안가도 좋고 그런 입장이었어요. 자유롭게 노래를 하고 싶던 제 꿈에 어머님도 결국 감복하셨죠.


- 꿈을 찾아 한국에 어렵게 왔는데 소회가 어떠한가.

사실 처음 한국에 왔을 땐 무척 힘들었어요. 북한하고 시스템이 다르니까요. 북한은 예능단체들을 당 차원에서 관리하고 밀어주는데, 남한은 다르더라구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기 힘으로 해야 했어요.
사기를 당하는 몇 번의 절망적인 과정에서 언제나 스스로 되새긴 건 나는 꼭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었어요. 지금도 이런 희망을 품고 매일 믿음으로 걷고 있어요.


- 한국사회에 바라는 점이 있는가

예술 분야 탈북자들에 대한 지원이 없어서 아쉬워요. 탈북 예술인들을 키워낼 수 있는 제도, 시스템이 절실해요. 능력이 검증된다면 재능있는 탈북학생들을 남한 사회의 멘토들과 연결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원시스템과 정보가 없는 탈북학생들이 정상궤도에 오르려면 5-6년 이상 걸리거든요.


- 예술인을 꿈꾸는 탈북자들에게 조언 부탁한다.

아무래도 예능 쪽은 길이 좁다 보니 유혹들도 많거든요. 남한 사회와 자기 분야에 대해 더욱 거시적인 안목과 지혜가 필요한 것 같아요.


-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팝페라 가수가 되고 싶어요. 조수미, 임태경, 임형주 씨를 존경하고요. 저도 이들처럼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는 음악인이 되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명성희 씨는 남한에서 음악인을 꿈꾸는 탈북인들에게 멘토가 되어 주고 싶다고 밝혔다. 보다 돌아가지 않고 바르게 가는 길을 인도해 주는 좋은 동역자가 되고 싶다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노래에 모든 열정을 바치겠다고 했다.

강철민 기자 / 뉴포커스

뉴포커스 admin@newfocus.co.k

<저작권자 © 블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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