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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연평해전 11년…애끓는 父情 윤두호씨

기사승인 2013.06.28  16: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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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윤영하 소령 흉상 바라보는 윤두호씨제2연평해전 당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한 고 윤영하 소령의 부친인 윤두호씨가 28일 오전 인천 송도고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해 윤 소령의 흉상을 바라보고 있다. 2013.6.28 ⓒ 연합뉴스

고 윤영하 소령 부친 "11년 지나도 늘 아들 생각이…"

(인천=연합뉴스) 강종구 기자 = 2002년 6월 29일 오전 11시.

온 나라가 한일월드컵 3~4위전 한국 대 터키전을 앞두고 흥분에 휩싸인 날 윤두호(72)씨는 여느 때처럼 충남 천안에서 회사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그때 부인에게서 온 전화 한 통. 수화기 너머 부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여보, 서해에서 북한군하고 교전이 발생해 부상자가 있다고 TV에 나오는데 우리 영하는 괜찮은 건지 부대에 좀 알아봐 줘요."

윤씨는 부대에 연락해 아들의 안위를 확인했다. 부대 측은 장교가 다치진 않은 것으로 보고됐다며 윤씨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TV 뉴스를 보던 윤씨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망자 윤영하 대위'

제2연평해전 사망자 명단에 아들이 이름이 있었다.

곧바로 부대 측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윤 대위가 전사했습니다. 국군수도병원에 시신이 안치돼 있습니다."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간 윤씨는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 있는 아들의 시신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보름 전 방송사 인터뷰에서 "월드컵 기간에도 서해전선은 이상 없이 철통경비를 서고 있습니다"라고 늠름하게 말했던 아들도 더 이상 말없이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29일은 2차 연평해전이 발생한 지 11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의 조준 포격에 참수리 357 고속정 정장 윤영하 소령(향년 29세. 순직으로 1계급 특진) 등 장병 6명이 숨지고 18명이 다쳤다.

비록 아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지만 선제공격을 받고도 끝까지 조타키와 방아쇠를 놓지 않은 357정 장병들의 투혼에 북한군의 피해도 막대했다.

11년이 지났지만 아들을 가슴 속에 묻은 아버지 윤씨의 눈앞에는 항상 아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 인천 송도고서 제2연평해전 고 윤영하 소령 추모식제2연평해전 당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한 고 윤영하 소령 추모식이 28일 오전 윤 소령의 모교인 인천 송도고등학교에서 열리고 있다. 2013.6.28 ⓒ 연합뉴스

해군사관학교 18기 출신인 윤씨는 해사 50기인 윤 소령의 32년 선배이기도 하다.

윤씨는 해사 후배인 아들에게 "장교는 국가로부터 선택된 사람으로 국가의 운명을 짊어지고 갈 재원이다. 항상 국가에 충성하며 국가에 보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전역 후 해운회사에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영국 런던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윤 소령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부응하듯 능통한 영어실력에 투철한 국가관을 바탕으로 임관 후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런 아들을 하루아침에 잃은 윤씨. '나라를 지키다 죽는 것이 군인으로서는 가장 영광된 죽음'이라고 아들에게 가끔 했던 말이 안타깝게도 쓰라린 현실이 돼 버렸다.

윤씨는 지난 27일에는 해군 제2함대의 지원으로 다른 유족들과 함께 연평도를 찾았다.

평택 제2함대사령부에서 연평도까지 유족을 실어나른 함정은 아들의 이름을 따 건조한 해군의 최첨단 고속함 '윤영하함(440t급)'이었다.

예전에 부두에 정박돼 있는 윤영하함의 내부를 둘러본 적은 있지만 항해하는 윤영하함을 직접 타 보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아들이 그렇게 오늘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우리의 해양영토를 사수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유족들도 오랜만에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평도 평화공원에 건립된 제2연평해전 전사자의 부조 앞에서 유족들은 다시 한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들은 부조로 조각된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오열을 참지 못해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이제는 잊어야지, 보내 줘야지 하면서도 아들을 잃은 아비 마음이 뜻대로만 되진 않습디다. 그래도 제2연평해전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격려도 예전보다 많이 커지는 것 같아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다 덮고 감사한 마음으로만 살아가려 합니다…"

윤씨는 28일 윤 소령의 모교인 송도고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아들의 흉상 앞에 국화꽃 한 송이를 헌화하고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뉴스팀 blue@bluetoday.net

<저작권자 © 블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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