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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살린 위대한 작전 ‘인천상륙작전’의 모든 것… “떠나자 인천으로”

기사승인 2016.07.26  18: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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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천상륙작전’ 발자취를 따라서… 역사투어 코스 추천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27일 개봉한다. 6.25남침전쟁으로 패망 직전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은 인천상륙작전이라는 결정적인 전투로 일거에 전세를 역전했다.
당시 UN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지휘아래 진행된 인천상륙작전은 1/5000이라는 낮은 성공 확률을 역으로 이용하는 전략으로 작전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장사상륙작전’을 진행하여 772명의 학도병이 전사하는 등 많은 비화가 있다. 이와 함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KLO부대의 활약상도 영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소개된다.
국가와 국민을 살린 위대한 작전, 인천상륙작전의 개봉과 발맞춰 영화 속 배경을 소재로 역사투어 코스가 개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인천관광공사(사장 황준기)는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등장하는 월미도, 차이나타운 등 역사적 명소들을 엮어 역사투어 코스 ‘머스트씨(Must See) 5를 소개했다.
월미도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였다. 이곳에는 영화 개봉을 앞두고 주연배우인 이정재의 게릴라 인터뷰 장소였던 월미문화의 거리를 비롯해 월미공원 등이 있다.
▲ 월미 평화의 나무 ⓒ 인천관광공사 블로그 캡처
이곳에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탄을 이겨낸 ‘월미 평화의 나무’가 있다. 상륙작전 당시 포격에서 살아남은 7그루의 나무로, 수령이 70년~245년 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등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평화의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그린비치, 블루비치, 레드비치 지점에 표지석을 설치했다. 이중 그린비치는 인천상륙작전 3개의 지점 가운데 하나로 당시 가장 먼저 상륙이 시작된 곳이다.
차이나타운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의 주역 맥아더 장군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차이나타운 위쪽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인 자유공원이 있다. 상륙작전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1957년 건립돼 지역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 리암 니슨은 영화 '인천상륙작전' 촬영 기간 중 인천 자유공원을 직접 찾아 맥아더 장군 동상에 헌화했다. ⓒ CJ E&M 제공
올해 1월 맥아더 역을 맡은 리암니슨이 이곳에서 맥아더 장군을 참배하며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를 더 깊이 배우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우방국가 젊은이들과 참전군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6.25전쟁 당시 전세 역전의 결정적 계기가 된 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1984년 9월 15일 개관했다. 상륙작전 당시의 장갑차, 전투기 등 대형장비가 외부에 전시되어 있다. 내부에는 유도탄 등 당시 사용됐던 무기와 군복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인천상륙작전 인천 촬영지 중 한 곳인 송도석산에 조성된 바닥지름 5m, 높이 8cm의 팔미도 등대 재현물도 기념관 내에 전시돼 관람객을 맞이한다. 28일부터 8월 10일까지 ‘그 날, 인천. 승전의 불을 밝히다’를 주제로 사진전도 열린다.
팔미도는 청정함을 자랑하는 인천의 대표 섬이다. 군사보호구역으로 일반인 출입이 통제됐으나 2009년 개방된 만큼 발길이 많이 닫지 않은 곳이다.
단 섬 체류시간은 1시간에서 3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다. 연안부두에서 약 1시간 정도 유람선을 타면 갈 수 있다.
▲ 팔미도 등대 ⓒ 인천관광공사 블로그 캡처
이 곳에 있는 팔미도 등대는 1903년 설립되어 2003년까지 운영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1등 공신으로 꼽힌다.
인천상륙작전 전날, 맥아더 사령부의 켈로부대는 작전 성공을 위해 월미도로 진입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인천항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비추는 팔미도 등대를 점령했고 등대의 불을 밝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대한민국을 죽음 직전에서 건저올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팔미도 천년의 광장에서는 30일 영화개봉 축하 기념 음악회가 열린다.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영흥도에는 해군영흥도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상륙작전 당시 영흥도 첩보전도 진행됐다. 한국해군은 1950년 8월 18일과 20일 덕적도, 영흥도에 상륙, 8월 23일 영흥도를 확보하기까지 여러 명의 병사를 잃었다. 해군의 또 다른 부대는 상륙작전 직전에 만들어진 해군 첩보부대로 월미도 등 서해안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적군과 교전을 벌였다. 이 작전에는 함명수 소령, 김순기 중위, 임병래 소위 등 17명이 투입됐다.
▲ 영흥도 해군전적비
상륙작전 하루 전 잔무 처리를 위해 영흥도에 남아 있던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대원은 북한군과 전투 중 비밀 유지를 위해 자결했다. 함명수 소령은 숨진 부하를 기리기 위해 매년 영흥도를 찾고 있다.
클라크 대위와 숨은 소년특공대들의 상세한 정보 덕분에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도에 주둔했던 북한군 대대 병력이 영흥도로 몰려와 소수의 해군 장병과 소년특공대원들은 섬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과 격렬히 싸웠으나 장렬히 전사했다.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화강암으로 전적비를 건립했다.

김영주 기자 bluekim@bluetoday.net

<저작권자 © 블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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