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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6.25전쟁 특집 ‘조국을 위해 나선 무명 용사들, 학도의용군’

기사승인 2016.06.24  15: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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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6.25전쟁 특집

'조국을 위해 나선 무명 용사들, 학도의용군'

▲ ⓒ 국방부 블로그 '동고동락' 캡처

한때 영화 '포화 속으로'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학도병'. 그들은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황폐해지고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자발적으로 전쟁터로 나간 학생들입니다. 전쟁터에 모인 학생들의 나이는 15세 이상의 어린 청소년과 청년들.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전할 만큼, 그들의 나라에 대한 평화의 염원과 애국심은 얼마나 뜨거웠던 것일까요?

국방일보에서 호국보훈의 날을 기념하여 진행하는 6.25전쟁 특집. 오늘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손규석' 박사님과 6.25전쟁에 참전했던 '학도의용군'에 대해 대화를 나눠봤습니다.


ㅣ조국을 위해 나선 무명 용사들 '학도의용군'

▲ 영화 '포화 속으로' ⓒ 인터넷 캡처

언제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이 사람들을 떨게 했던 1950년 6.25전쟁. 많은 사망자와 의도치 않은 이별로 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던 그 당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피와 땀을 흘린 학생들이 있습니다. 조국을 위해 서슴없이 전쟁터에 몸을 실었던 학도의용군, 그들의 나이는 15세에서 20대 초반까지의 학생 신분의 어린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쓰러질 듯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되찾기 위해 개별적으로, 또 많게는 수십 명씩 부대를 찾아와 싸우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학도의용군은 약 2만 5,000명에서 3만 명. 그들은 교복과 교모를 그대로 착용한 채 총을 들었습니다.

▲ ⓒ 국방부 블로그 '동고동락' 캡처
▲ ⓒ 국방부 블로그 '동고동락' 캡처

학도의용군이 처음 만들어진 계기는 전쟁이 발발하고 국군 장병들을 위해 위문활동을 하던 '학도 위문대'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학도 위문대' 학생들은 전쟁 중 위기에 처한 한강 방어선을 다잡고자 200여 명을 모아 '비상학도대'를 조직해 방어작전 지원에 나서게 됩니다. 한편 국군을 따라 남한으로 이동하던 일부 학생들도 대전에서 국방부 소속 '의용학도대'를 편성하게 되는데요. 7월 19일, '학도 위문대' 학생들은 대구에서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를 통합해 '대한학도의용대'라는 이름으로 학도의용군이 되어 비로소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 ⓒ 국방부 블로그 '동고동락' 캡처

학도의용군이 형성되고 그들이 실제 전투에 처음 투입된 것은 안동지구 전투. 안동지구 전투에서 우리 군은 북한군 주력 동선(안동, 의성, 영천)을 예상해 적군의 침입 경로를 방어하게 되는데요. 안동지구 수도사단 소속 학도의용군들이 제1군단의 지휘를 받으며 함께 방어전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남하를 막아오면서 대치하던 와중에 북한의 일부 병력이 포항에 침입하게 되는데요. 이 포항여중 전투에서 우리 군과 학도의용병이 함께 반격에 나서 북한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48명의 목숨과 바꿔가며 북한의 침입을 막는데 성공한 포항여중 전투는 학도의용병을 대표하는 전투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외 인천상륙작전, 원산 상륙작전, 백마고지 전투 등에서도 학도의용군의 활약은 끝이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특전사 격인 북한 766유격부대의 파상공세를 온몸으로 막아낸 학도의용병들의 투혼 덕분에 우리 군은 정신없이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하고, 효율적으로 방어선을 지키는데 충분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 ⓒ 국방부 블로그 '동고동락' 캡처

참전 학생들 중에는 바다를 건너 전쟁터에서 고군 분투한 재일 동포 출신의 '재일학도의용군'은 물론 간호, 선무활동과 유격전까지 함께 수행했던 '여자 학도의용군'도 있었는데요. 여자 학도의용군 중 일부는 황해도 도서 지역을 중심으로 유격대 활동을 하면서 남자 병사들 못지않은 활약을 하기도 했습니다.

▲ 영화 '포화 속으로' ⓒ 인터넷 캡처

전쟁의 많은 인명 피해로 병력 보충에 어려움을 겪었던 국군에게 학도의용군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실전에 참전하는 군인들을 위해 밤에 보초를 서거나 본래 임무 외에 잡무를 하는 등 허드렛일을 많이 했었는데요. 소수 인원으로 이곳저곳 산발적으로 참전하다 보니 체계적인 관리를 받지 못해 초기에는 군복이 아닌 교복을 입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국방에 대한 훈련도, 무기도 갖추지 못한 채 싸워야만 했던 학도의용군이었지만, 그들은 조국을 위해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해 함께 해줬습니다. 군의 병력 수급 문제를 해결한 것은 물론, 전황을 반전시킨 역사적 사건에서도 그들의 역할은 대단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다른 참전용사들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ㅣ 펜 대신 총을 손에 거머쥔 학생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 영화 '포화 속으로' ⓒ 인터넷 캡처

"학생들이 용산고등학교에 350명 모였어요. 그래서 트럭을 타고 7사단의 평양 입성에 합류하면서 참전하게 됐죠. 북한군이 양민학살을 하는 걸 눈으로 봤고….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살리기 위해 뛰어든 것이지.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강성모 린나이코리아 명예고문. 2011년 7월 군사편찬연구소와의 인터뷰 중-

"배화여고에서 학도의용군로 지원했어요. 여자들이 하는 것은 간호였고, 어느 순간 학도의용군에서 육군 소위가 됐어요. 당시 나이가 어려서 그랬는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였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할것입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여성 학도의용군. 2011년 10월 국가보훈처와의 인터뷰 중-

과연 '나'라면 조국이 위기로 뒤흔들릴 때, 두려움과 불안을 무릅쓰고 전쟁터로 향할 수 있었을까요? 어린 나이에 두려움을 애국심으로 이기고, 오직 조국의 안정을 위해 전쟁터로 나섰던 학도의용군.

실제로 그들의 존재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시기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합니다.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사지에 뛰어든 '무명의 용사', 그들의 용기와 애국심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는 보다 체계적인 자료와 연구 분석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더 알리고 위훈을 기려야 할 것입니다.

출처: 대한민국 국방부 대표 블로그 ‘동고동락’ (http://mnd9090.tistory.com/4316)

인터넷뉴스팀 press@bluetoday.net

<저작권자 © 블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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