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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6·25 전시납북자⑦] 슬픔을 멈추기 위하여

기사승인 2018.09.18  00:4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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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이여 UN이여, 지옥으로 가는 우리를 구출하여 준다는 것은 우리의 신념이라!”

조국이여, UN이여

자유여 그대는 불사조

우리는 조국의 강산을 뒤에 두고

홍염만장(紅焰萬丈) 철의 장막 속

죽음의 지옥으로 끌려가노라

조국이여 UN이여

지옥으로 가는 우리를

구출하여 준다는 것은 우리의 신념이라!

-평양형무소 벽에서 발견된 무명 납북자의 시

평양형무소 벽에서 발견된 무명 납북자의 시다. 조국과 UN이 구출해 줄 것이라는 납북자의 신념에 조국과 UN은 부응하지 못 했다. 휴전 후 벌써 6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북한에 생존 전시납북자도 거의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납북 범죄는 6.25전쟁 이후에도 자행돼 왔다. 납치 대상은 한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포함됐다. 이들은 외국인, 특히 일본인을 납치해 대남·해외 공작 활동에 이용했다.

그런데 얼마 전 송갑석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 12인은 북한 정권이 거부감을 갖고 있으니 ‘납북자’를 ‘실종자’로 바꿔 부르자는 개정 법안을 발의했다가 납북인사 가족, 인권단체 등으로부터 반대 여론이 일자 슬그머니 철회했다. 한 마디 사과도 없었다. 이들은 전시납북자를 두 번 유린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오는 18일에서 20일 사이 평양에서 김정은을 만나 반드시 ‘납북자의 귀환’을 요구해야 한다. 조국이 구출해줄 것을 굳게 믿었던 납북자의 신념을 짓밟지 않기를 바란다.

■ 납북과 인권, 그리고 자유통일을 위한 노력

6·25전쟁 중 자행된 민간인 납북은 반인도적 범죄이자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었다. 민간인의 강제 연행과 그 과정에서 가해진 폭력, 불법적 억류, 본거지로 돌아갈 권리와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할 권리 박탈 등은 1949년에 채택된 ‘전시 민간인의 보호에 관한 제네바 제4협약’의 위반이며, 오늘날의 국제형사법상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우리 정부는 납북 사건이 발생한 직후부터 납북자 송환을 위한 일련의 노력을 진행해 왔다. 하지만 정치·사회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노력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990년대 말부터 ‘화해·협력’이라는 정책 기조 하에서 남북 간에 다양한 교류와 협력이 이뤄졌지만 전시 납북자 문제는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60여 년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북한이 여전히 납북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우리부터라도 국가적 재앙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그 상처를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이들의 아픔을 위로해 줘야 할 것이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왼쪽), 1956년 이해연이 발표한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수록된 음반이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미아리 고개를 배경으로 납북자 가족의 아픔을 읊은 노래로서, 피난길에 어린 딸을 잃은 작사가 반야월의 개인적인 아픔이 함께 담겨 있다. ‘일편단심 민들레야’(오른쪽), 1981년 조용필이 발표한 ‘일편단심 민들레야’가 수록된 음반이다.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납북자 김동섭의 아내 이주현이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쓴 동명의 자서전을 기사화하여 조용필이 작곡하고 부른 곡이다.

■ 계속 되는 납북

정전협정 이후에도 북한은 어선, 비행기,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해 국내·외에서 남한 국적을 가진 민간인 총 3835명을 납치했다. 이 중 3319명은 남한으로 돌아왔으나 아직도 516명의 전후납북자가 북한에 억류돼 있다.

전후 납북은 주로 1960 ~ 70년대에 집중적으로 발생했고, 어부가 약 88%로 가장 많다. 전후납북자들은 해상에서 어로작업을 하거나 해수욕장에 놀러 갔다가 납치됐다. 또한 해외에서 납치돼 납북되기도 했고, 1969년에는 미간 항공기가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북한의 김정일은 1976년 “공작원의 현지화 교육을 철저히 하라. 이를 위해 현지인을 데려와서 교육시켜라”고 납치 지령을 내렸다. 그 후 1977년부터 1978년에 걸쳐 공작원 교관으로 삼으려는 목적으로 한국인과 일본인, 기타 12개국의 외국인 납치가 집중적으로 자행됐다.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범 김현희(왼쪽), 북한이 1978년 일본에서 납치했던 다구치 야에코(오른쪽). 사진=KBS 뉴스(2011년 1월 20일) 캡쳐

납치된 외국인은 ‘지도핵심공작원’의 현지화 교육에 이용됐다. 일례로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범인 김현희는 일본에서 납치한 다구치 야에코(田口 八重子)에게서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고, 중국인 납치 피해자인 공령앵(孔令罌)에게서 중국인화 교육을 받았다.

2000년 이후 현재까지 생사가 확인된 납북자는 93명에 불과하며, 이 중 35명만이 가족과 상봉했다.

외국에서의 주요 납북 현황

외국에서의 주요 납북 현황

 

김성훈 viking8933@naver.com

<저작권자 © 블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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