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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6.25 남침전쟁, 대한민국을 도와준 나라들 ④ 룩셈부르크

기사승인 2016.06.08  1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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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벨기에 정부와 함께 군 파병

1950년 6월 25일은 북한 공산군이 남한을 불법 남침한 6·25 전쟁이 벌어진 날입니다. 6·25남침 전쟁에는 세계로 확산하던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변두리 국가’였던 남한에 참전해 피를 나눈 국가가 있었습니다.

6·25전쟁은 같은 동포가 우리에게 칼을 겨룬 전쟁이자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간 첨예한 대립이 빚은 국제적인 비극입니다.

본지에서는 6·25 남침전쟁 66주기를 맞아 UN참전 용사의 호국정신을 되새기고자 북의 공산화 남침전략으로부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친 UN 소속 국가의 참전 배경에 대한 기획특집을 연재합니다.

▲ 국제 기구 및 UN회원국들 브라질, 대만, 쿠바, 에콰도르, 아이슬란드, 레바논, 리베리아, 멕시코, 니카라과, 파키스탄, 파라과이, 페루, 우루과이 그리고 베네수엘라도 전쟁 기간 동안 한국에 대한 물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인터넷 캡쳐

1950년 6월 25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인해 6.25전쟁이 발발한다. 이에 유엔은 1950년 6월 28일 제2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 연합군을 결성하여 파병할 것을 결의했다.

유엔 연합군의 이름으로 전투병력과 장비 등을 지원한 전투지원 16개국과 병원선, 의료진, 의약품 등을 지원한 의료지원 5개국 등으로 총21개국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안보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을 결정했다.

오늘은 16개 병력지원국 중 벨기에의 625(남침)전쟁 참전 배경 및 벨기에의 개황에 대해 알아보자.

▲ ⓒ 인터넷 캡쳐

룩셈부르크의 6·25(남침)전쟁 참전 배경

룩셈부르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 국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유럽 내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려면 아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룩셈부르크 소대는 유엔군 중에서도 가장 작은 규모를 갖고 있어 파병의 최소 요건인 1천 명의 군인 수를 충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예외일 수밖에 없었다. 룩셈부르크의 인구는 20만으로 작은 규모였기에 대규모로 군인을 파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베네룩스 3국 중 하나인 벨기에 정부와 군을 함께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룩셈부르크의 소대를 벨기에 대대에 통합하게 된다. 결국, 룩셈부르크는 1950년 11월 대한민국에 44명의 자원 보병군인 소대를 파병하게 됐다.

벨기에 의용대 또는 갈색 베레모로 알려진 B.U.N.C는 요셉 폴리엔 정부에 의해 625전쟁에 참전한 벨기에-룩셈부르크군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해당 대대는 1951년과 55년 8월 기간 복무하면서 53년 휴전협정 이후에도 한국에 주둔했다. 해당 기간이 끝날 무렵 총 3,171명의 벨기에군과 78명의 룩셈부르크군이 한국에서 복무했다.

룩셈부르크 개황

·위치: 유럽 북서부
·인구 : 48만 6000명(2008 기준)
·면적 : 2,586㎢
·수도 : 룩셈부르크
·공용어 : 룩셈부르크어, 프랑스어
·통화 : 유로
·종교 : 가톨릭교, 개신교
·정치·의회 형태 :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정식 국명은 룩셈부르크 대공국으로서, 영토면적은 2,586㎢, 인구는 48만 6,000명(2008년 기준), 수도는 룩셈부르크이다. 벨기에의 남쪽, 독일의 서쪽, 프랑스의 동쪽에 위치하며, 이들 세 나라에 둘러싸여 있는 내륙국이다.

나폴레옹이 유럽의 골동품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작은 나라지만 장기간 독립국의 위치를 유지했다. 역사적으로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완충국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의 의원내각제이며, 의회는 임기 5년의 단원제(60석)이다.

언어는 룩셈부르크어와 독일어·프랑스어가 사용되며, 종교는 가톨릭교가 87%, 개신교 등이 13%이다.

기후는 온대성 기후로, 발달한 철강공업으로 풍요한 생활을 누리고 있고, 총수출의 90%를 철강제품이 점하고 있다. 국내총생산은 501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10만4673 달러(2007년 기준)에 달한다.

▲ 낙동강을 건너는 룩셈부르크 병사들의 모습 ⓒ 국가보훈처 제공

한국-룩셈부르크 관계

룩셈부르크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우방국으로 다른 베네룩스 제국과 함께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계속 지지해 왔으며, 1949년 8월 우리나라를 승인하고, 1961년 11월 4일 양국 간 국교가 수립됐다.

1973년 10월 발족된 한국∙룩셈부르크 친선협회가 대표적 친한 단체이며, 1977년에는 한국·벨기에·룩셈부르크 민간경제협력위원회를 발족시켜 양국 간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게 된다.

양 국가는 1970년 6월에 사증면제 협정을 비롯하여 1976년 9월 한국·벨기에·룩셈부르크 투자보장 협정, 1978년 6월 한국·벨기에·룩셈부르크 경제협력 협정, 1984년 11월 한국·룩셈부르크 이중과세방지 협약, 1987년 1월 한국·벨기에·룩셈부르크 해운 협정, 2000년 한·룩 항공협정, 2003년 4월 항공 협정이 체결됐다.

우리나라의 대 룩셈부르크 수출액은 2405만 달러, 수입액은 6323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산업전자제품·기계부품 등이 있으며, 철강제품·섬유류·화학제품 등이 수입품 주종목이다.

한편, 양국 간에는 1977년 5월 국회 6·25전쟁 참전의원친목회의 룩셈부르크 방문, 1982년 4월 한국·벨기에의원친선협회 우리 측 의원단의 룩셈부르크 방문이 있었고, 제24회 서울올림픽에는 14명의 룩셈부르크 선수단이 참가했다. 13명의 한국인 교민과 49명의 체류자가 있다(07년도 기준).

류진석 기자 press@bluetoday.net

<저작권자 © 블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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