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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의 교훈

기사승인 2013.11.22  21: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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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부터 후방으로 진격한다

▲ 장진호 전투 ⓒ 인터넷 캡처

지난 19일, 美 뉴스전문 채널 CNN은 “미국 해병대 창군 이래 최초로 세 명의 여성이 해병대 보병훈련과정(Infantry Training Course)을 수료했다”고 보도했다. 美 해병대의 ITC는 12주의 신병훈련을 마친 해병 전투요원들이 또다시 이수해야 하는 59일간의 필수과정으로, 엄격한 체력검사와 혹독한 훈련으로 정평이 나 있다. 장병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체계적인 전투기술은 물론 극한의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 동료에 대한 신뢰, 부상당한 전우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신념 등을 습득하게 된다. 훈련의 강도가 높은 만큼 모든 과정을 이수한 해병 전투부대원은 자부심이 매우 높고, 그래서 美 해병 전투부대는 미군 중에서도 ‘금녀(禁女)의 벽’이 가장 높은 곳이다. 그러한 美 해병의 문화는 ‘어퓨굿맨(A Few Good Men·1992년작)’ ‘지아이 제인(G.I. Jane·1997년작)’ 등의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통상 해병대는 상륙작전으로 해안교두보를 확보하고, 증원병력이 전개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부대다. 美 해병대는 약 20만3000명의 현역과 4만 명의 예비군으로 편성돼 있다. 1775년 창설 이래 약 240년 동안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세계 전사(戰史)에서 가장 화려한 전적을 남기고 있는 군대다. 그중 해병 제1사단은 美 해병대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부대다. 그런데 이 부대가 상징적인 존재로 부각된 것은 다름 아닌 6·25전쟁 기간에 벌어졌던 ‘장진호 전투(the Battle of Chosin Reservoir·1950. 11. 27~12. 13)’ 때문이다. 당시 해병 제1사단은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혹한을 극복하고 열 배에 가까운 중공군 9병단(兵端)에 맞서 승리를 거두면서 ‘강인한 군인정신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1950년 10월 26일, 북한의 함경남도 원산에 상륙한 美 해병 제1사단은 美 육군 제7보병사단의 일부와 함께 평안북도 강계에서 워커 장군이 이끄는 美 제8군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험준한 낭림산맥(林山脈)을 넘는 강행군이 100여 ㎞나 지속됐지만 장병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당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서울탈환·평양점령 등 성공적인 반격작전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산에 상륙한 이 부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익숙지 않은 험준한 산악지역과 혹독한 영하의 날씨였다. 설상가상으로 유엔군이 38선을 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던 마오쩌둥(毛澤東)이 대규모 병력을 참전시켰다. 이로 인해 1만2000명의 해병 제1사단은 장진호 지역에서 12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 제9병단에 포위당해 자칫 전멸당할지도 모를 위기에 처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엔군사령부로부터 흥남항을 통한 철수작전 명령이 내려졌고, 해병1사단은 피란민들까지 이끌고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까지 가야 했다.

 

 철수를 위해 장진호 남단의 작은 마을 하갈우리(下碣隅里)를 떠나기 전 해병들은 ‘해병대가(The Marines Hymn)’를 소리 높여 불렀다. “우리는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조국을 위해 싸운다. 정의와 자유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명예를 위해 싸운다.” 그들은 자신들을 막아선 중공군의 치열한 공세에 맞서 “적이 온다. 해병답게 싸우다 죽자!”고 외치며 달려들었고, 새하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과 도로는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 결국 중공군은 美 해병의 거센 반격으로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17일간의 사투(死鬪) 끝에 해병 제1사단은 중공군 제9병단 예하 사단들을 차례로 격파하며 흥남에 도착했고, 이들이 중공군의 진출을 지연시킨 덕분에 흥남철수작전을 통해 유엔군 10만 명과 피란민 10만 명이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 결과 중공군 제9병단은 3만8000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해 1951년 3월까지 전선에 투입되지 못했다. 덕분에 유엔군과 국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개시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이 중공군 제13병단의 기습공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했던 상황을 감안하면 동부전선에서 거둔 해병 제1사단의 전과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당시 ‘뉴스위크’는 장진호 전투를 진주만 이래 최악의 패배라고 불렀지만, 해병 제1사단에게만은 찬사를 보냈다. 역사학자 에드윈 호이트(Edwin P. Hoyt)는 해병대가 수행한 장진호에서부터의 행군을 “군사(軍史)상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 중 하나”라고 불렀고, 군사전문가 마틴 러스(Martin F. Russ)도 그의 저서 ‘브레이크아웃(Breakout:the Chosin Reservoir Campaign, Korea 1950)’에서 “장진호 전투는 유엔군의 전략적 패배 속에서 이뤄 낸 전술적 승리”라고 평가했다. 훗날 전문가들은 공중 화력지원, 탁월한 전술적 운용 등이 장진호 전투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어떠한 작전적·전술적 분석도 장진호 전투에서 발휘된 美 해병 제1사단 장병들의 투철한 감투(敢鬪)정신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당시 전장을 취재하던 영국 종군기자가 후퇴작전의 여부를 묻자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 장군(Gen. Oliver P. Smith)은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이다!(We are not retreating. We’re just advancing in a different direction!)”라며 거칠게 쏘아붙였다. 그의 답변은 오늘날까지 어떠한 환경의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美 해병대의 강인한 군인정신과 감투정신을 상징하는 격언으로 남아 있다. 우리 장병들이 장진호 전투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기억해야 할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국방일보 http://kookbang.dema.mil.kr/

<저작권자 © 블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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