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우리가 이승복을 두 번 죽였다”

기사승인 2018.06.26  11:39:30

공유
ad37
default_news_ad2

1968년 12월 9일 저녁 7시경, 같은 해 11월에 울진·삼척지구 해상으로 침투한 북한의 무장공비 중 잔당 5명이 우리 군·경의 추격을 피해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에 위치한 한 초가집에 숨어들었다.

이승복의 아버지인 이석우(당시 35세)는 집을 비운 상태였고, 부인 주대하(당시 33세), 맏아들인 승권(호적명 이학관, 당시 15세), 승복(당시 9세), 승수(7세), 그리고 막내여동생인 승자(4세) 등 어린 4남매가 어머니와 함께 집을 지키고 있었다.

초가집에 침입한 공비들은 아이들에게 북한 체제를 선전하고 ‘남한이 좋으냐, 북한이 좋으냐’ 며 사상적 귀순을 강요했다. 이 때 이승복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며 저항했고, 격분한 공비들은 어린 승복의 멱살을 잡고 입을 벌린 후 소지하고 있던 대검으로 이승복의 입을 찢어 살해했다. 이후 발견된 승복의 시신에는 오른쪽 입술 끝부터 귀밑까지 찢어진 상처, 뺨 중간과 귀 근처에 +자(십자) 형태의 상처 2개가 뚜렷했다.

공비들은 눈앞에서 승복의 끔찍한 죽음을 보고 겁에 질려 있는 이승수와 이승자도 벽에 던져 죽였고, 이승복의 어머니인 주대하를 대검으로 수차례 난자하여 죽였다. 맏아들 승권도 대검에 가슴을 관통당하는 등 36군데 상처를 입었지만 살아있어 공비들이 나간 후 이웃집으로 피신해 병원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

무참히 승복 일가족을 살해한 공비들은 짚단으로 시체를 위장한후 도주하였다. ⓒ 대한뉴스

이 끔찍한 사건은 한국 정부와 국민의 반공 태세를 한층 공고히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반공이 국시가 되는 것에 직간접적 영향을 강하게 끼치게 된다. 또한 사건의 주인공인 이승복은 반공의 상징이 되어, 전국의 많은 초등학교에 동상이 세워지고, 1975년 10월에는 대관령 정상에 이승복 반공관이 설립되었으며 80년대 초반 대대적인 개축공사와 함께 성역화 되었다.

이승복 군이 다니던 학교 (이승복 기념관) ⓒ 블루투데이
이승복 군이 다니던 학교 (이승복 기념관) ⓒ 블루투데이
이승복 군이 다니던 학교 (이승복 기념관) ⓒ 블루투데이

 

 

 

 

 

 

 

그러나 문민정부 등장 이후, 반공 분위기가 약화되면서 이승복이 실존인물이 아니며 반공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정치적 창작물의 주인공이라는 주장이 국민들 사이에 암암리에 퍼져 나가게 된다. 심지어 한 초등학교 이승복 동상에는 ‘나는 네모 도시락 초딩’ 이라는 낙서가 십수 년째 남아 있었다. 이는 이승복이 사각형 도시락 통을 들고 있다는 데서 착안한 아이들의 낙서로 보이지만, 이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은 고인에 대한 분명한 모독이었다.

1998년에는 미디어오늘의 편집국장 김종배와 그의 기사를 바탕으로 ‘오보 전시회’를 연 김주언의 기사가 발단이 되었다. 김종배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 는 기사를 통해 ‘조선일보의 기사는 작문’ 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조선일보측은 김주언과 김종배를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하기에 이른다.

7년이 넘는 재판 끝에 2006년 대법원 형사 2부(대법관 김용담)는 김주언 전 언론시민연대 사무총장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김종배 전 미디어오늘 편집장에 대해서는 무죄를 확정했다. 재판부는 김종배에 대해 “허위 내용을 보도한 것은 사실이나 기사 작성 당시에는 허위임을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며 무죄를 선고했다.

또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사건 당시 이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발언에 대해 승복의 형 승권(호적명 학관)씨의 진술과 당시 이를 전해들은 이웃 주민 최순옥, 서옥자씨 등의 일치된 증언, 시신 중 유일하게 입가가 찢어진 이승복의 시신 사진 등을 종합할 때 이승복의 발언은 사실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따라서 피고인들이 주장해 온 ‘허구, 조작, 작문, 오보, 소설, 조선일보 기자 현장 부재설’ 등은 허위 사실의 적시에 해당한다” 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판결에 이승복의 형 이승권씨는 법원 판결 직후 “춤이라도 추고 싶다” 며 “그동안 사람 사는게 아니었다” 고 밝혔다. 이승권씨의 부인 김인자씨도 “이승복 사건이 조작이라는 말 때문에 남편이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 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승복의 발언을 허위 사실로 매도해 고인의 명예뿐만 아니라 유족들의 마음에도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하지만 상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군사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내걸고 이승복의 발언을 언급하고 영웅화하며 ‘반공소년’ 이라는 칭호까지 붙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참사 당시 9세에 불과했던 이승복이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념을 이해하고 반공의 입장을 펼쳤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총을 든 공비들이 늦은 시간 집에 쳐들어와 형과 어머니를 위협하고 북한을 찬양하도록 부추기니까 용기를 내어 “나는 공산당이 싫다” 고 외쳤던게 아닐까? 승복의 용기있는 외침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 실제로 반공적 성향을 띠었다고 보기에는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

그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국민이었고 가끔 반찬투정도 하고 강원도의 산골을 천방지축 뛰어다녔을 평범한 초등학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 이승복을 이념 경쟁에서 놓아주고 그가 가족들을 지키고자 순수한 용기를 담아 공비들에게 외쳤던 소년으로 기억해야 하겠다.

이승복 동상(이승복 기념관) ) ⓒ 블루투데이

 


이승복 이름으로 평화를 그리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도서구입 안내
http://www.bluetoday.net/event/event08.html (클릭)

권유미 블루유니온 대표 bluekim@bluetoday.net

<저작권자 © 블루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기사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