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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양아래』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기사승인 2016.05.04  19: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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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1.
다큐멘터리와 픽션 영화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디렉션(direction)의 유무(有無)다. 연출자가 상황에 개입하면 극영화가 된다. 빠져서 카메라 앞의 피사체가 무슨 짓을 하든지 그냥 내버려 두면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의 역사는 영화의 출발과 동일하다. 뤼미에르 형제가 촬영한 '공장으로부터의 귀가’나 '기차의 도착’은 다큐멘터리였다. 픽션 영화로서의 영화는 멜리어스의 '달세계 여행’에서부터 시작된다. 픽션 영화보다 다큐멘터리의 역사가 더 긴 셈이다.
다큐멘터리의 어원은 '가르치다’의 뜻을 가진 라틴어 '도체레(docere)’다. 여기에서 본보기, 모델, 교훈, 가르침, 증명을 뜻하는 도큐멘툼(documentum)이 나왔고 이게 영어, 다큐멘터리로 발전했다. 도세레는 또 여러 갈래로 갈라졌는데 docte(현학적인), docteur(의사 또는 박사) doctrine(교리, 학설, 교훈) 등이 그것이다. 이 단어들만 가지고도 우리는 다큐멘터리가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교육이거나 프로파간다거나 전문적이거나. 미디어 연구가로 유명한 로저 실버스톤은 우리 주변의 영상을 네 개의 채널로 나눴다. 현실에 대한 보고가 단순히 사실 그 자체인 경우에는 뉴스, 특정한 사실보다 어떤 감정이나 정서에 호소할 때 드라마, 이도 저도 아니고 무작정 감정에만 호소하는 경우 오락이나 예능 그리고 마지막이 사실에 바탕을 두고 이성에 호소하는 다큐멘터리다. 이 분류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다큐멘터리의 경우 그 정의만 가지고도 풍족한 논쟁을 즐길 수 있다. 먼저 사실이다. 그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라고 했는데 이는 객관적인 사실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객관적인 사실이라. 한번 살펴보자.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나는 활을 잘 쏜다.”이다. 조선 최고의 궁수였던 장인에게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았으니 활쏘기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봐도 숱하게 나오는 게 활 쏘는 이순신이다. 틈만 나면 쏘았다. 기분이 좋을 때는 좋아서 쐈다. 기분이 나빴을 때는 나빠서 쐈다. 부하들과 회식하고는 뒤풀이 겸 쐈다. 두 번째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몸이 아프다.”이다. 열거한 증세를 놓고 보면 세종대왕과 막상막하다. 세 번째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원균은 나쁜 놈이다.”이다. 일기는 타인이 보지 않는 것을 전제로(물론 반대인 경우도 있지만) 쓰는 것이다. 여기에 특정인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이토록 반복해서 적은 것은 원균의 인간성이 책임질 일이 아니다. 원균에 대한, 트라우마에 가까운 피해의식 및 콤플렉스가 이순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순신을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치자. 세 번째로 자주 등장하는 말을 맨 앞에 배치하면 다큐멘터리의 성격 자체가 달라진다. 객관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만든다 해도 작가의 선택과 배치에 따라 그 결과물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는 얘기다.
영ㆍ정조 시대는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린다. 두 임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가 경제를 되살렸다. 정치의 영역에서 보면 영조는 소론과 노론을, 정조는 노론의 벽파와 시파로 갈린 정치 세력을 탕평책으로 통합하며 안정을 이뤘다. 이런 정치 안정과 경제 풍요를 이유로 우리는 그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 안정과 풍요를 배경으로 사대부와 평민들 사이에서 '조선적인 문화부흥 활동’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특히 정조에 대한 평가가 그렇다. 정조는 과연 문화 군주였던가. 아쉽게도 별로 그렇지가 못하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다. 정도전의 나라였고 송시열의 나라였으며 조선의 왕은 중국의 천자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양반과 사대부의 대표였을 뿐이다. 태종과 세조 그리고 숙종 시절 일시적으로 왕권이 강화된 시기를 제외하면 왕은 실권이 없었고 사대부는 자신의 이념과 다를 경우 왕을 갈아치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공자, 맹자, 주희로 이어지는 중국의 고전을 앞세워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문체반정은 그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정조는 당시 유행했던 참신한 문체를 잡문체로 규정하고 짓눌렀다. 청나라 문물기행인 '열하일기’를 금서로 지정했으며 박지원을 혼냈다. 조선 후기에 싹트기 시작했던 문화적 경향을 억압 하고 언로를 봉쇄했다. 정조가 설치한 규장각에는 문체반정에 도움이 되는 책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최악으로 말해 사상통제였다. 그는 분명 시대를 역주행하고 있었다. 한편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이었던 현릉원을 다녀온 기록들을 보면 그 그리움이 도를 넘어선다. 한참을 가다고 멈춰서 울었으며 발길을 돌리다가 또 울었다. 정조의 마음은 병들어 있었다. 악의를 가지고 정조를 폄하하려 들자면 사료는 차고 넘친다는 이야기다.
해서 다큐멘터리 작가인 프레드릭 와이즈먼은 객관과 공정을 위해 평생을 노력했으나 결국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했다, 는 소회를 남겼다. 객관적인 사실이나 진실은 포착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작가의 취합 여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가르는 기준이 디렉션의 있고 없음이라고 했지만 실은 디렉션의 존재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의 성향인 셈이다. 그래서 로저 실버스톤의 '사실에 바탕을 두고 이성에 호소하는’ 이라는 정의는 현실적으로 성립이 어렵다. 아마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작가가 인정 하는 혹은 주장하고 싶은)사실에 바탕을 두고 이성에 호소하는’
2.
이제 본격적으로 <태양 아래>이야기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북한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았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며 “북한 역시 공산주의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한 소녀의 삶을 통해 조명하고 싶었다”고 했지만 그의 기획은 실행단계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한 소녀의 삶을 통해 북한사회를 조명하려고 인물을 물색했고 북한 당국은 5 명의 아이를 후보로 제시했다. 비탈리 만스키의 선택은 8살 먹은 진미라는 소녀였다. 소녀의 이미지만 본 것이 아니다. 진미의 아버지는 기자,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며 낡고 비좁은 아파트에서 조부모까지 함께 지낸다는 조건까지 본 것이다. 그러나 촬영 당일 현장에 간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멘붕 상태에 빠진다. 인물은 그대로였지만 그 외의 것은 모두 달라져 있었다. 조부모는 사라졌고 비좁은 집 대신에 주체사상탑이 보이는 평양의 최고급 아파트가 제공되었으며 진미의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로 직업이 바뀌었다. 현장에는 요청하지도 않은 현지 조연출들까지 나와 있었다. 이들은 감독 대신 레디 액션을 외쳤고 수없이 많은 테이크를 반복했다. 당초 북한의 평범한 생활상, 인간이 사는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으려 했던 그는 촬영 도중 북한이 어떻게 체제 선전을 위해 현실을 왜곡하는가를 보여주는 쪽으로 제작방향을 바꿨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다큐에 개입하는 북한 당국의 모든 행동을 생략하지 않고 촬영했다. 이 영화는 그렇게 열 받은 감독이 방향을 선회해서 만든 '다큐에 관한 다큐’인 것이다.
제목인 <태양 아래>의 태양은 물론 김일성이다. 아니 삼위일체니까 김일성과 김정일과 김정은일 수도 있겠다. 영화의 내용은 태양절 행사를 준비하는, 막 소년단 머플러를 목에 두른 진미를 통해 전체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을 질식시키는지를 촘촘하게 담았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진미 가족의 아침 식사다. 김치를 어느 정도 먹으면 하루에 필요한 비타민의 반을 섭취할 수 있는지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 장면은 계속해서 반복 촬영된다. 현장의 조감독들은 더 밝고 명랑하게 아침 담화를 나누는 가족을 보여주려고 진미 가족의 진을 뺐다. 이를 감독은 교묘하게 보여주는데 앵글에 담기는 시계는 7시 35분을 가리키는데 뒤로 보이는 실제 시계는 4시 40분을 경과하고 있다. 몇 시간 째 그들은 가족의 위치를 바꾸고 대사의 톤을 조절하며 그렇게 연출을 해 댄 것이다. 진미의 표정은 조금씩 어두워져 간다. 그 과정을 감독은 아버지의 공장에서의 에피소드 그리고 진미의 학교생활을 통해 보여준다. 명령과 획일성에 의해 무너져가는 동심의 모습은 처절하다. 진미의 아버지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전문배우는 테이크가 반복될수록 연기의 디테일이 살아나지만 일반인들은 반대로 조금씩 정상正常에서 멀어진다. 가족의 표정은 총체적으로 공허하다. 진미는 두 번 눈물을 흘린다. 무용 스탭을 익히다가 그리고 마지막에 교회에서의 신앙고백에 가까운 김부자 찬양 나레이션을 하면서다. 관객들은 어이가 없어 처음에는 웃지만 나중에는 주인공들과 같이 침통해진다. 전체주의가 말살한 개인의 모습은 섬뜩하게 참담하다. 영화의 마지막은 태양절 날 광장에서 김부자 동상에 꽃을 바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채워진다. 동상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는 가족들의 표정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다. 아무도 원치 않는데 모두가 그렇게 하는 이상한 파라다이스는 관리인들이 제단에 놓인 꽃다발들을 수거하는 장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소중하게 가져다 바친 그 꽃다발들은 무성의한 손길에 의해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연출에 의한 일상이 끝난 후 뒷정리에 평양의 진짜 얼굴이 담겨있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은 북한이 옛 소련의 스탈린 시대 상황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 시대에 개인의 자유는 제한됐지만 속으로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본 북한은 달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 주민들은 현재 살고 있는 자신들의 삶 외에 다른 삶을 알지 못하고 이를 추구할 기회조차 없다. 자신들과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 이전의 북한 관련 다큐는 대부분 경제적 풍요와 빈곤의 대비를 테마로 했다. 그러나 비탈리 만스키가 잡아낸 북한은 그보다 훨씬 끔찍했다. 인간이 사라진 기이한 동토의 왕국을 전체주의라는 괴물이 초상화로, 동상으로, 벽화의 모습으로 배회하고 있었다. 그는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인간의 가장 큰 가치는 자유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고 싶다고 했다. 관객들이 이 다큐를 통해 그들이 누리는 자유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다. 김민기의 '금관의 예수’다. 70년대 남한의 풍경을 비관적으로 바라본 그 노래가,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불리어져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참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그 땅에 우리의 동포들이 살고 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메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남 정 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collecter1@naver.com)

자유경제원 http://cf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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